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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정공>귀정공휘병두행장(龜亭公諱秉斗行狀)
龜亭公諱秉斗行狀 公諱秉斗字元七龜亭其別號也即述菴公諱善浩子也妣朔寧崔氏未能齋後孫士人相朝女咸安尹氏士人鶴檢女公之兄弟皆崔氏出而公即居一以 憲宗丁未十一月二十五日生于龜山世庄儀度莊重寡然不佞言笑才思贍敏直斷無二八而事父祖出而接長上自齠齡己如老成人年十三丁母夫人憂戚易兩至吊者驚異二十一歲而丁父公憂其病也進迫焦燥合藥視粥書宵不遑寧暇則沐浴禱天辭淚俱迸及遭大故攀號幾絶庀終以禮時祖母在堂氣息奄奄恐致傷添疾必以愉惋辭色時時 省之隣里以爲養生喪死各盡其道云事仲父如嚴父必禀而後行處從昆季如同氣居無物我家門雍睦如也 高宗丙戌戊子之兩歲大浸前古所未有而族戚朋舊之不能自食者與之同爨鄉黨老幼之方轉溝壑者計口賑之行旅流焉携槖而塡門者隨意資給日無倦色賴而得活者無慮千百計莫不啣恩稱德噪于遠邇產業稍稍剝落然尤致力于祭祀賓客曰席父祖之蔭不繼父祖之志可乎湛樂爲歲久傾圯園蕪而沼平公擔力一新之曰此吾先子孝友之傳俾吾子孫寧無居室不可使此齋廢也又築小亭於外舍之傍巖石之上願曰龜頭亭自述以見志盖隱耕讀不求聞達修先胎後無忝家聲如斯而己王掌令性淳拓實而記之公有宿症醫云難治至是更肆一日以家事托二弟曰吾將不起矣但恨早失慈母又不得終養繼母奈命何爾其寬慰老母養奉善之其他奉祭祀接賓客恤貧族敎姉姪一如吾在日毋思分戶待兒成立也遂恬然而逝時 高宗庚寅五月十九日葬于所居之案山後移可壯洞先山左麓壬坐原娶瑞山柳瓚根女慶州鄭彦昌女皆先公歿而不字更聘士人全義李熙燮之女淑哲有壺儀錄在本郡輿四男長淇煥次正煥又其次曰成煥日煥孫休警休照休三淇煥出休泰休一休暎正煥出休林日煥出系出成煥休勝日煥出曾孫昇勳休警出良勳憙勳炅勳用勳休照出整容澣容休三出武勳昌勳東勳休泰出餘不盡錄噫公生于積仁累義之家其胚胎前光固有異於人者而篤日用彛倫之行抱兼善濟物之量爲政不出於家鄉猶可寬鄙而敦薄玉帛不賁天又嗇之壽此有識者之所共咨嗟齎恨今距公歿近四十載月朝公評班班愈不替此巳足以狀公而得不朽矣不佞一言誠不足而有無今其胤子淇煥錄一二俾余叙次之將以介於秉筆之家義何敢辭諾吁謹狀 歲柔兆攝提格遯月上浣 昌寧 曺元承 撰 귀정공휘병두행장(龜亭公諱秉斗行狀) 공의 휘는 병두요 자는 원칠(元七)이며 귀정은 그 별호고 술암공(述菴公) 휘선호(善浩)의 아들이시다. 비는 삭녕최씨(朔寧崔氏) 미릉재후손사인상조(未能齋後孫士人相朝)의 따님과, 함안윤씨(咸安尹氏) 사인 학검(士人鶴儉)의 딸로 공의 형제는 다 최씨 소생인데 공이 장남이다. 헌종(憲宗) 정미(丁未一八四七)년 十一월 二十五일에 귀산 세장에서 출생하였는데 거동과 기량이 씩씩하고 무거우며 과묵하여 말과 웃음을 함부로 아니하고 재주와 생각이 넉넉하고 민첩하여 두 길이 없이 곧게 재결하며, 들면 부조를 섬기고 나가면 장상(長上)을 경대하더니 七·八세 때부터 이미 노성한 사람 같았다. 十三세때 모부인 상사를 당하여 슬퍼하고 치상함이 지극하니 조상한 자가 다 놀라와 하였다. 二十一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부친이 병환중일 때 초조하게 진퇴하며 약과 죽을 살피고 밤낮으로 편안한 틈이 없으나 혹 시간이 나면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하며 말과 눈물을 함께 흘렸다. 마침내 돌아가시니, 휘어잡고 부르짖으며 거의 끊어질 듯 하다가 초종을 예로써 다스렸다. 이때 할머니가 집에 계셔서 기운과 숨이 끊어지려고 하니 슬퍼하여 병이 더할까 두려워하고 반드시 화이한 말과 안색으로서 때로 살피니 이웃과 마을 사람이 다 산 사람을 살피고 죽은 사람을 보내는데 각기 그 도를 다한다고 말하였다. 중부(仲父)를 친아비 섬기듯하여 반드시 여쭌 뒤에 모든 일을 행하고 사촌 형제를 동기같이 대하여 네것 내것이 없이 사니 집안이 화목하였다. 고종(高宗) 병술, 무자(戊子一八八六∼一八八八)년 흉년은 일찌기 볼수 없었던 대흉년이었던바, 족척과 친구중 능히 스스로 먹지 못한 자는 더불어 함께 먹고, 고을 늙은이와 어린이 중 굶주려 궁굴게 된 자를 수를 헤아려 구휼하고, 거리를 헤매다 자루를 메고 문을 메운 자를 뜻에 따라 배급함에 날로 게으른 빛이 없었다. 힘입어 삶을 얻은 자 무려 천백을 헤아리니 은혜를 입고 원근이 송덕 아니한 자 없었다. 가업이 점차 기울어지나 더욱 제사와 손님 접대에 힘을 다하여 말하기를, 부조의 은덕을 입고 부조의 뜻을 계승안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담락재가 해가 오래되어 기울어지고 무너져 정원이 덧거칠고 못이 매몰된 것을 공이 홀로 새롭게 고치며 말하기를, 우리 先子가 효우로 전하면서 우리 자손으로 하여금 차라리 사는 집이 없을지언정 이 재는 폐하지 말라 하시었다 하고, 또 작은 정자를 바깥 사랑 곁바위돌 위에 세우고 귀두정(龜頭亭)이라 현판을 걸어 스스로 기술하여서 뜻을 보였는데, 대개 숨어서 읽고 현달을 탐하지 아니하며 선영을 받들고 후손을 경계하여 가성을 욕되지 아니하게 이와같이 하였을 따름이었다. 왕장령(王掌令) 성순(性淳)이 실상을 열어 기록하였다. 공이 오래된 병이 있는데 의원이 치료하기 어렵다 하니 다음날 家事를 두 아우에게 부탁하되, 『내가 장차 일어나지 못할 것 갈다. 일찍 자친을 잃고 또 마침내 계모 봉양을 마치지 못하고 가나, 내 명이라 어쩔 수 있나. 너희가 노모를 위로하고 착하게 봉양할 지어다 기타 제사를 받들고 빈객을 접대하는 일과, 빈족을 구제함과 자질을 교육하는 것은 일체 나의 생시같이 하여, 분호하지 말고 아이가 커 자립할 때를 기다릴 지어다.』 마침내 조용하게 서거하니, 때는 고종 경인(庚寅一八九○)년 五월 十九일인데 사는 마을 안산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가장동 선산 좌록 임좌원에 이장하였다. 서산(瑞山) 유 찬근(柳瓚根)의 딸과 경주(慶州) 정언창(鄭彦昌)의 따님을 취하였는데 다공보다 먼저 죽고 아들이 없어 다시 사인(士人) 전의(全義) 이희섭(李熙燮)의 따님을 취하였는데 맑고 어진 부덕이 있어 본군 여지(輿誌)에 기록되었고, 아들은 기환(淇煥)·정환(正煥)·성환(成煥)·일환(日煥)이요 손자 휴경(休警)·휴조(休照)·휴삼(休三)은 기환 소생이요, 휴태(休泰)·휴일(休一)·휴영(休暎)은 정환 소생이며, 휴림(休林)·휴승(休勝)은 일환 소생인데 성환이 아들이 없어 휴림이 출계하였고, 증손 승훈(昇勳)은 휴경 소생이요, 양훈(良勳)·희훈(憙勳)·경훈(炅勳)·용훈(用勳)은 휴조 소생이며, 정용(整容)·한용(澣容)은 휴삼 소생이요, 무훈(武勳)·창훈(昌勳)·동훈(東勳)은 휴태 소생이요, 기타는 어려서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이 인덕을 쌓고 의리를 더한 가문에 태어나서 그 포태전 광택이 보통사람보다 다른바가 있는 자로 날로 쓰는 떳떳한 천륜의 행실이 두텁고, 겸하여 착하게 물건을 건진 국량을 품고도 정기가 집과 고을에 지나지 아니한 것은, 오히려 가히 더러운 것을 너그럽게 보고 엷은 것을 두텁게 한 것이다. 공이 옥백을 꾸미지 아니하고 하늘 또한 수를 아끼니 이는 유식한 자 함께 탄식하고 한을 품을 바로다. 이제 공이 별세하신지 四十年 공평한 평론이 아롱아롱 더욱 감퇴치 아니하니 이로서 족히 공을 장행하고 영구히 전할 것을 얻었다. 나의 한 말이 진실로 유무에 부족하나, 이제 그 큰아들 기환이가 하나 둘을 기록하여 나로 하여금 다음을 서술하여 장차 붓을 잡을 자에 끼어달라 함으로 의리상 어찌 감히 사양하리요. 승낙하고 감탄하여 삼가 씀. 창녕(昌寧) 조원승(曺元承)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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